중경삼림

2021. 8. 10. 01:48Movie

왓챠에서 시네필들을 위한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헐 왓챠에 이동진>이라는 프로그램의 기획은 전문가의 시선으로 다양한 영화 안팎의 이야기를 풀어놓아, 영화에 관해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영화 애호가들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충분하다. 아직 파일럿 포함하여 3회밖에 없는 프로그램이지만, 나는 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왓챠가 영화 전문 OTT로써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을 엿본 것 같다. 오늘 파일럿 회차였던 왕가위 감독 편을 보고 시대적·지리적 배경을 포함한 설명을 듣고 왕가위 감독의 어법을 더 깊이 알게 되면서 이 프로그램의 효과를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왕가위 감독을 알아가다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중경삼림>.

내게는 <중경삼림>에 대한 히스토리가 싶다. 스무살 새내기 때 '영화의 이해'라는 과목을 들었는데, 필수 교양이라 다른 옵션은 없었지만 이 과목을 들으며 영화감상에 대한 참맛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때 과제로 나갔던 영화 중 하나가 <중경삼림>이었다. <바그다드 카페>, <델마와 루이스>, <붉은 수수밭> 등 주옥같은 영화를 교수님이 내주셨지만, 내 뇌리에 강력하게 박힌 영화는 다름 아닌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었다.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보고 싶고, 그곳의 감성과 정서를 흡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든 게 이 영화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홍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지금, 현재의 홍콩은 더 이상 이전의 홍콩이 아니지만 나는 여전히 그때의 홍콩이 그립고 가고 싶다.

<중경삼림>은 크게 두 가지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223과 금발여인의 홍콩의 밤처럼 찰나 같고 어두운 사랑과 663과 페이의 홍콩의 낮처럼 밝고 여행 같은 사랑. 당초 홍콩의 밤과 낮을 소재로 기획된 영화였는데, 두 에피소드의 대비되는 분위기에 볼 때마다 여운이 길게 남는 것 같다. 특히 223 에피소드는 왕가위 감독 작품 특유의 핸드헬드와 빛이 길게 자국처럼 남는 미장센 덕분에 223의 독백에서 묻어나는 고독이라는 정서가 깊게 스며들었고, 663 에피소드는 반복하며 등장하는 '캘리포니아 드리밍'과 '몽중인' 음악 덕분에 두 인물 간의 기다림이 더 설레게 느껴졌다.

홍콩 문화 하면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 누아르 영화를 많이 생각하나, 나는 왕가위의 감성을 생각한다. 그만의 60년대 홍콩의 향수,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혼란스러웠던 분위기, 자전적인 이야기를 적당히 블렌딩한 고독과 기다림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잘 섞인 왕가위 감독의 작품은 특히 지금같이 후덥지근한 여름이 잘 어울린다. 순간 이게 뭔가 싶은 영화겠지만 찬찬히 음미하는 것을 꼭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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