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문구

2019. 9. 13. 19:03Book

나는 노트필기를 좋아하면서 성적은 썩 좋지 않았다. 내 공부방법이 그닥 효율적이지 않았다는 점도 이유였지만, 한번 쓴 노트필기는 두번 다시 보지 않는다는 게 한 몫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공부를 하는게 아니라, 다이어리를 꾸미는 것처럼 노트를 필기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면서 문구류에 관한 지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어릴 때부터 하루의 낙은 동네 문방구 매장 한복판에 있던 펜 판매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 교보문고 그 향보다 좋아했던 냄새는 문구점 특유의 쿰쿰한 공기. 그런 나에게 <아무튼, 문구>는 근래 읽었던 책 중에 가장 마음을 설레게 했다. 사실은 이전에 <문구의 과학>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여러가지로 어려워서 출근 길에 읽다가 잠시 포기하던 참에 <아무튼,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나 저제나 밀리의 서재에 언제 들어오나 싶었는데, 입고된 걸 알자마자 얼른 대여하게 됐다. 

이 책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표현은 '문구인'이다. 그동안 '문구'라고 하면 어린 아이들이 한푼 두푼 살 수 있는 그 나이대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서 무심코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문구인이라는 표현은 문구라는 한 장르를 개척하여 취미의 어떤 것으로 취급하는 기분이 들었다. 또한 그 표현 덕분에 저자가 갖고 있는 문구에 대한 깊은 애정을 알 수 있기도 했다. 게다가 문구를 좋아하는 그 자체를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것들을 싹 해소해주는 단어이기도 했다.

<아무튼, 문구>는 아무튼 이래저래 손글씨 같은 책이었다. 모든 게 디지털로 쉽게 기록할 수 있는(심지어 이 글마저 키보드로 치고 있는!) 세상에서 손으로 만지고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문구에서 사람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가 논하고 있는 문구사랑의 글이 저자가 손으로 쓴 듯한 느낌도 받기도 했었고. 이렇게 쓰다보니 이 책은 '취향'을 향한 로드맵처럼 느껴진다. 영화나 음악, 책 같은 스테디한 콘텐츠가 아니더라도 문구를 드디어 취미로 꼽게 된 저자처럼 내가 좋아하는 장르에 대한 애정을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한 겹 한 겹 쌓아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또 그 용기를 믿고 하나의 장르로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혹시 정말 사소한 걸 좋아해서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아무튼, 문구>를 읽고 당당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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